사단법인 민족음악원

K 시인에게 보내는 양막리 편지 조회수 : 2,083, 2011-01-19 09:57:48
박복진 홈페이지홈페이지


K 시인에게 보내는 양막리 편지

서울보다 4-5 도는 덜 춥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체감온도는 -10 도 안팎의 이곳
양막리 새벽 기온이다.  전방 군인들이 사용하는 방한 목도리에 방한 벙어리
장갑에, 중무장을 하고서 새벽 뜀질에 나가는데 갑자기 머리에 한기가 파고든다.

아뿔사 ! 털실로 짠 방한 벙거지 모자는 실올 사이에 파고드는 냉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다음 주에 모나코로 해외 출장을 가는데 감기가 들면 낭패일 것이다.

손가락 보온을 위해 끼고 있던 벙어리장갑을 벗어 머리 위에 얹히고 그 위에 털실
벙거지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조금 달려보니 머리에 파고드는 냉기는 막아진 것
같았으나, 손가락에는 금방 한기가 덮쳐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뒤뚱뒤뚱
달리기 시작했다.  금방 콧속의 수분이 얼기 시작해서 호흡이 찐득찐득해진다.
그 사이를 뚫고 근처 농가들의 가축분뇨 냄새가 싸아 하고 들어온다.

K  시인아,

이곳은 충남 예산 양막리.  궐련 한 대 필 시간만큼의 여유도 없는 5일 동안의
빡신 장구 교습 수련회가 열리는, 사물놀이 이광수 큰 선생님의 민족음악원이
있는 곳이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 까지 몰아 재끼는 풍물 교습 사관학교이다.

지난 밤에는 교습을 마치고 강의실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조촐한 뒤풀이를
하느랴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새벽 달리기를
건너뛸 수가 없어 불과 4 시간 여 쪽잠을 자고 여느 때처럼 새벽 뜀질에 나섰다.
추사 김정희 고택이 있는 방향으로 5km 정도 달리다가 저 아래 저지대 쪽을
바라보니 예산읍의 불빛들이 제법 사람 모여 사는 곳 같이 환하다

K  시인아,

나는 왜 이렇듯 장구에 대가릴 쳐박고 매달리는가? 나는 왜 나이 들어가며
설렁설렁 취미 수준으로만 그냥 하라는 아내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꾸만 풍물에 빠져드는가?  한동안에는 주변의 이런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을
내놓았었다.  우리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허구한 젊은 날 무역 외곬으로
해외 뭇나라들을 돌아다니다보니 우리 것에 대한 미칠 정도의 애착이
나서라고...  그러나 내가 장구의 열채와 궁채를 잡고 가락을 두드리다보니 그것은
어쩌면 대답을 위한 대답,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단어의 조합이었던 것 같다.  대신 가락의 흐름을
서투르나마 조금씩 익혀가는 지금, 같은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서편제 영화의 한 대목, 이따위 광대 노릇 때려치자는 아들의 말에 그 애비는 불같은
노기를 드러내며 하는 말, “ 무엇이 어쩌고 어째 이놈아? 지 소리에 지가 미쳐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게 이 소리 속판이여 이 놈아 “

왜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더 좋은가?  좋다는 의미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그것은 내 몸속, 내 핏속에 녹아있는 바로 내 몸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비이토벤같은 어느 누가 오선지에 음계를 적어 하루 아침에 작곡
한 것이 아니라 논두렁에서 밭이랑에서 쟁기질하며 호미질하며 저절로 흘러나왔던
우리 조상의 가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두메산골, 졸졸졸 모난 자갈
궁굴리며 보드랍게 흘러가는 시냇물, 지지배배 종달이 겨드랑이 간지리는 봄날의 아지랑이,
쑥꾹쑥꾹 골짜기 멤도는 산새 소리가 만들어준 내 나라 내 강토의 숨소리이기에 그토록
편하고 절로 흥이 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소리를 찾아가는 내 발걸음은 고로, 무엇을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삶의
부대낌으로 잊고 있었던 내 호흡을 다시 찾아가는 길일 것이다. 잊었던 내 호흡,
내 맥박을 찾아가는 길을 어느 누가 왜 그 걸음을 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 K  시인아,
나는 지금 별도의 작심으로, 별개의 새로운 길을 찾아 새로 입문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릴 적 아주 여린 감정으로 익히 보아왔던 나의 어머니 아버지들,
울긋불긋 고깔쓰고 풍장 치며 고샅길을 누비셨던 그 소리를 못 잊어 내 육신과 혼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 뿐이다. 그냥 그것인 것이다. 나이가 듦에 그냥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K  시인아,

한반도 황단, 종단 완주로 대한민국 울트라 마라톤 명예의 전당에 내 이름 석자가
입적될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나는 왜 뛰는가? 그리고 그 이전의
조금은 풋내기 시절 대답을 다 페기처분하고 이 대답을 내 완주기 말미에 적었었다
“ 뛰면 그냥 좋으니까요..  ‘Cause it pleases me ! "  

그래서 나는 왜 장구, 우리 풍물에 빠지는가? 라는 현문에 이런 우답으로 말하고싶다.
“ 그냥 좋으니까요...  ‘Cause it's jolly good ! " 자네는 어떤가, 내 대답이...??

자, 오늘 아침 뜀질도 이제 다 와 간다.
양막리 마을 입구의 “ 민족음악원 좌로 30m " 라고 씌인 팻말이 고된 순례길 마지막
성지같이, 헤푼 기생의 큰 젖무덤같은 포근함으로 나를 다시 반기고 있다.  나갈 때는
캄캄하더니 지금은 주변이 환해지고, 조금 전 전봇대의 보안등도 톡 꺼지고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K 시인아, 내가 좋아하는 K 시인아...

춘포
박 복진
( faab  마라톤화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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