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민족음악원

대전일본에 실린 이광수선생님 인터뷰 기사 입니다. 조회수 : 1,340, 2012-11-24 19:34:00
임경진


이광수 명인 신기(神技)와 광기(狂氣) 쇠채비 인생, 비나리로 승화  
월요일에 만난 사람- 비나리 명인 이광수  

사물(四物)놀이는 어느 자리에서나 신기와 광기를 발휘한다. 트인 마당이나 좁은 무대위를 가리지 않는다. 가락을 타고 상쇠가 몸을 흔들기 시작하면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과 합일된다. 부포놀음, 상채발이, 까치놀음의 몸짓과 흥에 어느샌가 무아지경에 이른다. 내가 남이고 남은 내가 되고, 상쇠가 된다.

충청도 남사당패에서 신동으로 비나리를 하며 북과 쇠를 잡았던 이광수 명인은 사물놀이 1세대 창시자로 궤적을 그었다. 그의 쇠가락과 비나리는 어디서나 관객의 가슴에 널을 뛰게 한다. 객석을 미치게했던 그의 무대는 충남 예산으로 옮겨졌다. 지금도 세상을 향해 신명나게 소리하는 그를 만났다.



코에 멈추는 바람이 시리기 시작한 늦가을, 이광수 비나리 명인이 있는 충남 예산 민족음악원을 찾았다.

6살때부터는 전국 팔도를, 20대 이후에는 전세계를 누볐던 그가 어느덧 예산에 자리를 잡은지도 20여년이다.

풍물을 중심으로 민족혼을 찾자는 생각에 1993년 고향인 예산으로 내려와 민족음악원을 세웠다. 고향을 지키며 비나리를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우리 음악의 보전과 계승을 '정통'으로 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서다.

"사물놀이가 보편화되면서 전국민이 우리가락을 즐기는 건 뿌듯하고 환영할 일이에요. 하지만 가락의 전수가 정통적이지 않고 가르치는 사람에 좌우가 된다면 안될 일이지요."

그는 초등학생부터 40-50대까지 가리지 않고 민족음악원을 찾는 이들에게 우리가락을 가르치고 있다. 민족음악원을 찾는 이들은 '이광수' 세 글자로 찾는 이들이다.

창(唱)이 한(恨)을 담아 우리네 정서를 대변해주는 카타르시스적 역할을 하는 소리라면, 비나리는 축복을 내려주는 일종의 기도와 같은 성격이다.

'비나리'는 인간을 끼고 도는 횡액을 막아주고 수명과 명복을 기원하는 노래로 1990년 광복 45주년 범민족음악회때는 이 '비나리'로 남북 공통의 정서인 민족의 통일염원을 담아내기도 했다.

"비나리라고 하는 건 비나이다, 비는 소리, 축원의 소리 염원의 소리, 희망사항입니다. 어떻게 보면 토속신앙과 같은건데 우리 할머니들이 장독대 옆에 물 한그릇 떠놓고 비는 것, 정월대보름 집집마다 고사상을 소박하게 차려놓고 하는 소리도 비나리입니다. 비나리는 우리가 염원하는 소리라 할 수 있는것입니다. 사람들이 들으면 쌓였던 어떤 감정들이 한 번에 해소되는 돈이 나오는 노래. 그게 바로 비나리입니다."

이광수의 비나리는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 뜻 전달에만 주목하지도 않는다. 그의 비나리는 소리 초성도 좋고, 사설의 문서도 무궁무진하다. 소리의 배짱과 총기도 뚜렷하다.

비나리를 하면서 그가 독특하게 창출해내는 심오한 가락의 의미는 오래전부터 '비장미(悲壯美)의 극치'로 평가되고 있다.

이광수는 비나리 명인으로 이전의 명인들이 모두 소멸하고 있는 즈음에 비나리를 온전히 아는 유일한 명인으로 졍평이 나있다.

수십년 소리를 해온 만큼 오랫동안 다져 곰삭혀져 묵직하면서도 정감있는 비나리가 그의 입에서 흐른다.

"요즘말로 교과서적인 말보다 피부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비나리를 배웠던 열분의 스승 중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스승들에게 공부를 하다보니까 자연스레 스승들의 여러 소리가 자연스레 내 노래가 된거죠. 어떤 면에서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는 그런 노래가 내 비나리입니다."

그가 비나리에 입문하게 된 것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내포지역을 대표한 유명한 남사당패 '뜬쇠'였다. 아버지를 따라 유랑하다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익히고 따라하다 6살 때 '신동'이라 불리며 남사당패 무동으로 입문했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잘할 수 밖에 없었던거였지요. 그러면서 어떤 눈에 띄는 아이가 나타났더라하면 밤잠을 새우고라도 달밤에 체조하듯 연습해 이겨버려야 했습니다. 그 사람을 이겨야 내가 마음 편하게 잠잘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잘한다하면 난 무조건 더 잘하려고 했지요."

남사당패에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마당에서는 모든이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전국을 유랑했지만 그도 공부욕심은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이상의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면서 중학생 또래의 친구들의 모습에 뭇내 부러웠던 때도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니까 초등학교 졸업장만 뗐지요. 교사는 뛰어난 아이니까 공부를 시켜야 한다하면서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거기까지였습디다. 중학생 나이 때에는 중학생 교복을 맞춰 입고 다니고, 중학교 교과서를 책가방에 넣고 다니고 단어를 외우기도 하고. 다행이었던 건 당시 남사당패 선생님들은 굉장히 유식한 분들이 많아서 그분들께 한문, 셈법 등을 배울 수있었어요."

비나리와 함께 이광수 명인에 붙는 수식어가 있다. 쇠채비다.

이광수는 '쇠를 잘치면서 비나리를 잘하는 사람'이다.

사물놀이는 그의 인생이었고, 남사당인의 피를 솟구치게 한 삶의 시작이었다.

"사물놀이는 20세기 말 우리 한국문화의 한 장르를 개척했죠. 전 세계적으로 한국하면 떠올리는게 사물놀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한류스타 원조가 사물놀이인데, 지금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보다 더 유명했고, 가는 곳마나 팬클럽이 따라다닐 정도였어요. 지금도 우리민족이 단 몇 명이라도 사는 마을에는 사물놀이 않는 동네가 없을 정도고, 제 인생도 사물놀이의 흥에 맞춰졌었습니다."

사물놀이가 전세계를 울린 건 가락의 흥 때문만은 아니다.

"꽹과리는 우리말로 대가리를 울립니다. 머리를. 북은 우리 심장을, 가슴을 울립니다. 1차로 하늘을 꽹과리가 울리면 북은 땅을 울리고 그 가운데에 공간대와 시간대를 잘라주는 게 징소리에요. 징과 꽹과리 사이에 장구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리고 땅과 하늘 사이에서 공간과 시간대의 소리, 세상을 울리는 소리가 바로 사물놀이지요."

사물놀이 탄생은 1978년 서울 대학로 소극장 공간사랑에서였다.

꽹과리, 징, 북, 장구 우리 정서가 녹아있는 4가지 악기를 든 김용배, 최종실, 이광수, 김덕수 등 네 명의 광대가 '웃다리 풍물' 가락을 연주했다. 네 광대는 풍물 악기 가운데 꽹과리와 북, 장구, 징 4가지 악기를 추려 마당이 아닌 무대에 섰다. 좁은 소극장에서 이들의 무대는 관객들을 신명의 세계로 몰아넣었고 당시 민족학자 심우성씨가 '사물(四物)놀이'라 칭하면서 시작을 알렸다.

이들이 한데 모인 후 198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PASIC)'에 출전했을 때는 사물놀이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30분간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세계 무대에 존재를 알렸다. 그 후 100여개 국에서 600회 이상 공연하며 사물놀이 열풍을 일으켰다.

3년동안 세계 무대의 갈채를 받았던 이들은 상쇠 김용배가 1984년 국립국악원으로 옮기면서 최종실(중앙대 타악과 교수), 김덕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각자 제갈길을 간다. 한국 사물놀이패보다 김덕수패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금이갔다. 우리가락의 전수에 대해서도 생각들은 달랐고, 결국 각자 길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91년 발전적 해체를 한다.

네 명이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후 이광수 명인은 방황의 길로 접어든다. 김덕수와의 인연은 그렇게 어긋났다. 약주를 달고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비나리를 할 때도 약주없이 견디지 못한 시간이 길었다. 불사른 청춘에 대한 원망과 후회도 섞여있었더랬다. 그런 그를 품은 건 고향인 예산이었다. 고향에 내려오면서 다시 쇠를 잡고 비나리를 하며 무대에 섰다. 혼신을 다하는 삶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상쇠 김용배가 짧은 생을 마감한 후 세상은 원조 사물놀이패가 다시 모이지 못할 줄 알았지만 2008년, 사물놀이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원년멤버가 모여 공연을 펼쳤다. 먼저 세상을 떠난 김용배 자리는 후배 남기문이 쇠치배로 영입되고 후에 이광수와 번갈아가며 쇠를 담당하게 된다.

이광수의 비나리 무대는 60대가 돼서도 무궁한 변화를 보인다.

"6분 공연이면 8분-10분 하는 건 의례예요. 하다보니 그렇게 돼대. 아직도 그런 열정이 있다는 걸 무대 내려와서 느낍니다. 혹자들은 20대와 30-40대, 50대 때와 소리가 달라지지 않았냐 하지만 이광수 비나리는 여전히 축복을 빌어주는 소리입니다. 묵은 된장처럼 진득한 맛은 더 깊어졌겠지요."

비나리 소리의 예술적 가치는 이광수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며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이광수 비나리를 들은 한 예인은 이렇게 전한다.

"이광수의 비나리는 은금보화의 창고를 지키는 고직이가 아니다. 비나리쇠에게 물려받은 보물을 차곡차곡 꺼내서 세상 사람에게 가르쳐주며 무엇이 진정한 소리인가 보여주려는 성실함을 간직한다. 전동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 시대의 가치를 뻗은 그는 예술적 창조자이다."

이광수 명인은 20여년 전 사물놀이패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고 있다. 우리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공간을 만들자는 약속이었다.

"사람은 꼴값을 해야한다는 말이 있어요. 자신의 생김새값을 해야한다는건데, 그 값을 해야죠. 60대에 들어선 지금도 공부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우리가락이 침체되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물려 받았으니까 사명감도 남다릅니다. 욕심은 부리지 말자, 아는 범위내에서 정도의 한국 전통예술을 후학들에게 가르치자는 마음으로 우리가락을 가르치렵니다."

강은선 기자 groove@daejonilbo.com



■ 이광수 명인은



이광수 명인은 충남 예산에서 9남매중 6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이점식씨는 남사당패에서 전국에 이름을 알린 '뜬쇠'였다. 6살 때 남사당패 무동이 돼 상모돌리기와 던질사위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꽃만드는 법에서 부적, 꽹과리, 북, 상모 만드는 법을 배웠고 당대 최고의 뜬쇠들에게 살판, 줄타기, 온갖 풍물굿과 남사당놀이를 두루 섭렵했다. 그중에서도 구음과 덕담으로 이어지는 '비나리'는 명창 박동진옹에 의하면 '꽹과리 못지않은 일품의 경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탁월함을 보였다. 10살 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66년 최종실, 김용배, 김덕수 등과 의기투합해 사물놀이를 창시했다. 이후 1993년 고향인 예산에 민족음악원을 개원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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